1차미션-도플갱어-도아연
불가능한 존재
“현장팀 여러분, 어차피 지원팀이 후처리도 할 텐데. 미리 왔습니다!”
도아연. 넥타이를 고쳐 매는 것을 잊지 않은 채 당당하게 외치며 걸어온다. 멋진 등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영 씨? 이명? 현장팀 여러분? 어떤 시선도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팀원들이 벌써 내부로 들어갔나 싶어 무심코 문을 연다. 무형의 손이 도아연을 순식간에 끌어당긴다. 반항할 틈도 없이 끌려간다. 쾅! 문이 닫히고, 그렇게 당한다.
아야야야... 방 안에 두 명분의 곡소리가 울린다. 겹쳐 들리는 본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자 반대편의 도아연과 눈이 마주친다. 나란히 바닥에 앉아 허리를 짚고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밀어 넣어진 것이 분명했다.
“거울?”
이라고 말하는 순간 거울이 아님을 깨닫는다. 입을 연 건 한쪽뿐이었다. 방 안에는 동그란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둘은 일어나 테이블을 중심에 둔 채 서로 빙글 돌며 걷기 시작했다. 거리를 좁히지 않고 경계하며 들짐승처럼 어슬렁어슬렁. 거울에 비친 상처럼 똑같이 걸으며, 똑같이 관찰한다.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영혼이 이어졌음을 느낀다. 그와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 저 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나의 생각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저 자의 생각이니까. 깨닫자 그들의 대화가 시선을 타고 흘렀다. 둘은 한 바퀴 반 돌고 동시에 의자에 마주 앉는다.
‘우린 영겁에 한 번 있을 확률에 의해 탄생했잖아? 2분의 1이 두 번만 일어나도 4분의 1인데, 똑같은 사람 둘이 만나는 게 정말 가능해? 하지만 4분의 1이 0.25고 45 아래로 3 6 11 13 34 45 42가 있으며 -2147483648과 10의 42승 사이에 185, 77, 19880519가 존재하는 이상 불가능은 없지. 그래서 내 생각에, 우리가 서로를 죽이려 들어선 안 돼. 이건 전입자의 함정이야. 시도하려는 순간 반드시 같이 죽게 될 테니까. 우린 상냥하고, 또 완벽한 몸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잖아? 각자 반 바퀴 더 돌아서 들어온 문으로 나란히 나가자. 평화롭게 말이지.’ 생각을 마치자 둘은 동시에 일어섰다.
둘은 정확히 반 바퀴를 돌았다. 마주 보는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다. ‘잘 가.’ 그렇게 문 앞에 선 도아연이 문고리를 잡았다.
입을 연 건 한쪽뿐이었다.
즉시 뒤돌아 심장을 도려냈다. 도아연의 심장 위로 놓인 정장과 셔츠가 샌드위치처럼 층층이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철퍽. 도아연의 두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성큼 다가가 내려다본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도아연이 흐린 시선으로 도아연을 올려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쳤군…. 흐르는 선혈이 웅덩이가 되어 구두코를 적셨다.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도아연은 도아연을 보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생을 기억해? 아니. 기억나지 않아. 아, 다행이다. 나도 그래….
도아연은 도아연을 뒤로하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2차미션-이마트-도아연
불가능한 추억
난나나나나나난난
라라라라라라
랄랄랄랄라(랄랄라~)라
“추억의 노래네요.”
추억? 그에게 추억이 있던가? 향년 30세로 죽어버린 도아연. 그 후로 새 삶을 사는 도아연이 6년의 세월 안에 이마트에 쇼핑을 간 적 있다면 그걸 추억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리가 없다. 이마트 송은 2011년도 전까지만 쓰였단다. 그러므로 그가 추억이라 뱉는 것은 그의 뼈에 새겨진 죽어버린 도아연의 추억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제가 아는 미국 배경 좀비 게임에서 사람이 젤 많은 건 마트였는데, 대한민국은 안 그럴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요.”
기분이다. 헬기타고 내리듯 마트 천장으로 뛰어내린다. 나부끼며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옥상 문을 열면 보이는 계단을 내려간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비상구 표시등 사이로 흰색의 인영이 지나간다. 아무 층에 멈춰 서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은 영원한 마트 5층이다. 걸어도 걸어도 끝은 없기 때문에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 역시 없다.
아연은 마트의 가장 넓은 중앙복도를 거닐며 품목을 구경한다. 양배추.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지구의 멘틀로 만들어진 진짜 지구 젤리. 할인하는 레오레 과자 박스. 두 개씩 엮인 체리맛 1.5L짜리 탄산음료… 오. 이건 좀 마음에 드네. 얼마지? 13.334원? 대박이네. 왜 안 사갔대. 도아연은 마침 바로 옆에 있는 카트에 탄산음료를 가득 싣고 다니기 시작했다. 꼭 쇼핑하는 것 같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정상적인 상품은 보이지 않았지만 끝도 없이. 계속해서 걸었다. 영겁의 시간 주사위를 굴려본 그에게 이정도 단순 반복은 쉬운 일이었다. FOOD라고 적힌 간판을 발견했을 때 겨우 걸음이 멈췄다. “드디어 나왔다.”
아연은 푸드코트에 도착하자마자 시식 테이블 모양의 등대를 세웠다. 빛 주변엔 동물도 벌레도 이끌리기 마련이므로 이곳저곳 헤매던 사람들이 등불 아래 모였다. 그들은 상당히 배가 고팠는지 좀비처럼 걸어다녔다. 마트에 진열된 음식은 이렇게 많은데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이전에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건데, 매년 버려지는 음식량은 생산되는 음식량의 30% 정도라던가. 가격 안정화를 위해 항상 부러 없애 유통량을 줄였다고 들은 것도 같다. 그런데 이해한다. 그렇게 조정되는 건 보통 음식 만들어 파는 사람도 힘들어서 그렇게 되는 거니까. 경제는 항상 어려웠다.
아연은 탄산음료로 가득 찬 카트 손잡이에 턱을 괴고 잔뜩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다 바닥을 내리쳤다. 플랫한 구두 밑창에서 탕!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그들이 있던 바닥과 자신이 서있던 바닥에 단차가 생겨 꼭 공연장 같은 형태가 되었다. 아연은 한 손으로 염력처럼 푸트코트 냉동고에 가득 찬 냉동피자들을 줄줄이 소세지마냥 꺼내왔다. 파인애플 피자였다. 아연이 양 손을 뻗자 불이 뿜어졌고, 피자들은 단숨에. 아주 맛있게 구워졌다. 그것을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 도아연이 외쳤다.
“이거 전부 공짜!”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피자에 손을 뻗는 사이에 표정 나쁜 직원이 서있었다. “계산 먼저 하셔야죠!” “내가 누군지 알아요?” “뭔데?” “로또 1등 당첨자요.” “헉.” “그래서 쏘는 겁니다.” “계산을 하라고” 아연은 카트에 담아뒀던 탄산음료를 잔뜩 흔들고 직원에게 폭탄처럼 던졌다. 직원의 이마에 탄산음료 페트병이 제대로 명중했다. 뚜껑이 터진 콜라가 푸쉬식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아연은 뛰어내려 그 직원의 어깨와 얼굴을 정확히 가격했다. 쿠당탕! 직원은 뒤로 넘어갔고 아연은 무사히 착지한다. 깔아뭉갠 직원 위에서 설계팀을 향해 무전을 쳤다. 푸드 파이트였다.
“하하하! 직원 한 명 잡았어요. 근데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직원한테 뭐가 있을까요? 지휘자들? 듣고 있어요? 민간인들은 대충 피자 먹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음… 민간인 맞나? 좀비일지도. 하여튼. 보호 중이고. 이 정도면 정보 충분하죠? 나가는 법 아무거나 말해봐요. 시도해 볼 테니까.”
'좀비 게임 그만 보라니까….'
궁시렁거리는 말을 뒤로하고 아연은 무릎 짚고 일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인애플 피자 한 조각을 집어먹었다. 치즈가 죽 늘어났다. 직원 이마에 명중하고 뚜껑이 터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탄산음료도 포획해 한 모금 들이켰다. 체리맛이 났다.
"계산은 알아서 할게요."
자본주의에는 별생각 없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쪽일까. 많은 돈이 오고 가며 경제를 이루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관찰할 부분이 있어 재밌었다. 그리고 언젠간 자신도 그 자본주의에 끼어들어 한 탕 해보고 싶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피해를 입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도와야지. 일단 지금의 본인은 가진 게 많았다.
“이런 마음가짐이라서 망했나.”
아픈 손가락을 회상하는 도아연이었다.
3차미션-진화-도아연
불가능한 대항
-그러니까
“당신같다는 말의 의미는요.”
흰 종이 위. 검은색으로 쓰이는 글자. 둘은 그들의 동료가 있는 곳과 완전히 격리된다. 이 글의 등장인물은 둘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둘의 대화를 쓰는 건 하나다. 심오하고 입체적인 ‘인간’ 둘을 나는 정확히 서술할 수 없어서, 한쪽이 높은 비율로 말하게 됐다. 많은 오류와 착오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인생사 ‘오류’로 가득한데. 별 것 아닌 것처럼 봐달라. 참고로 이 글은 도이도를 위해 마지막에 '씨발'을 붙여 도식과 클리셰를 *최대한* 피해 작성되었다.
도아연은 고개를 돌려 도이도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 앞에는 원시 스프가 있다.
“정말 말 그대로예요! 당신도 대적 불가능한 것을… 맞이해본 적이 있잖아요. 코드 오브 유토피아.”
“니가 그걸 왜 알아?”
이 이후로 도이도의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첫 장부터 미안하게 됐다. 대신 씨발의 발화자를 기대해도 좋다.
“제가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데요.”
아연은 스프로 돌아가는 기어가는 것들을 바라봤다. 팔과 다리가 똑같이 생겼고, 털과 얼굴은 없었으며, 몸통은 둥글고 납작해 사족보행을 하기에 적절해보였다. 매끈하고 작은 젤라틴같은 알갱이들이 뭉쳐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은 스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낱낱히 쪼개져 끝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입자조각으로 나뉘어졌다. 그 입자들이 바다를 이뤘다. 투명한 입자들이 모여 이루는 바다는 불투명한 색이었다.
“생물이 뚜렷한 진화를 보이려면 최소한 2만 년은 걸린대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약 4000년인 거 알아요? 이 말인 즉슨, 우리는 원시인들과 같은 뇌를 타고 났다는 거죠. 그런데 우린 꼭 진화한 것처럼 보여요. 사실은 문명이 진화했기 때문에 인간 역시 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생각하는데. 그럼 반대로 문명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는 걸까요?”
스프가 잔잔한 파도처럼 둘의 신발 밑창을 적셨다. 둘은 서있었다.
“문명 진화의 전제조건은 사상의 자유…라고. 당신이 갔다온 곳은 유토피아였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사상의 자유를 잃었죠. 난 그러니까, 당신이 다녀온 그 유토피아가 낙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유토피아’의 이름을 가졌을 뿐. 어떤 변화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똑 떼어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존재할 뿐인 개념. 원시문명.”
스프의 파도가 무릎을 적셨다. 둘은 서있었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이 그 세계에서 순응하던 하지 않았던… 당신이 옳았다는 거예요. 원시문명에서 사상을 탄생시켰으니까. 당신은 '생각'을 하니까요. 당신이 그들의 오류였던 게 아니라, 오류 속에 떨어진 정상이라고. 그들은 그게 두려워서 당신을 오류로 규정해버린 거죠. 언어와 사회와 거짓과 사랑을 발명한 것처럼.”
수많은 생명체들의 알갱이들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모래를 이뤘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희생당한 거지만… 결국 지금 당신은 또 규칙과, 법규와, 규정과… 대의명분에 구속되지 않고 사상의 자유를 가지고 있죠. 퇴화당하지 않은 거예요. 대적 불가능한 걸 이겨낸 거죠. 좀, 좀… 좀 쉽게 이긴 건 아니지만. 기억도 지우셨고? 네. 그렇지만… 하여간. 지금은 뭔가 반항도 하시고.”
웃으며 스프를 바라봤다. 무로 돌아가는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무로 돌아가지 않는 둘이 있다.
“난 대항할 수 없는 것은 더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나라도 당신을 오류라고 규정하고 싶을 거예요.”
운명.
“그래서 반대로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지 조금 기대돼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딸려오는 감정이 질투나 원망이 아닌 동경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도아연은 마지막으로 웃으며 덧붙였다. ‘어라? 이거 도식인가요? 클리셰? 욕이라도 덧붙이면 좀 안 같을까요? 씨발…!'
4차미션-불운-도아연
피와 살 도박장
"올인."
산처럼 쌓인 칩을 전부 판에 밀어뜨리는, 담배와 술을 빼놓을 줄 모르는 남자. 칼같이 잘랐지만 방치한지 꽤 된 듯 흐트러진 백색 머리와 다홍색 눈을 가진. 꽤 반반한 얼굴의 남자. 도아연. 올인이라는 외침에 몇 사람은 웅성거리고, 몇 사람은 탄성을 내지른다. '3000짜리 판이라고! 나도 미친 패를 볼 수 있는 건가!' 그러나 진짜들은 웃는다. 기대하셔도 돼. 우리 도박장의 VIP시거든. 던져놓는 카드의 패는...
"투 페어!"
"투 페어에 올인을 했다고?"
"VIP라니까! 통 크다고!"
뒤이은 사람이 풀하우스, 스트레이트를 내놓는다. 그들이 도아연의 칩을 모조리 쓸어간다. 도아연 자리는 참, 초라하게도 단 하나의 칩만이 남는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그는 동공의 초점이 명확했다. 제정신이었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저래?"
"듣기론 사업가라던데."
석유 부자래, 그 대학교 출신이라던데? 수석? 몰라. 기사에서 이름 본 것 같은데. 창창하네. 수도권에 있는 모든 대기업을 전전긍긍했다던가. 연봉 미쳤겠는데! 부모님이 고위 관리라고. 30살밖에 안됐다며?
도아연이 숙덕이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앞담 까시네?"
"회장님 한 푼만 주십쇼"
도아연이 단 하나 남은 칩을 튕겨 그에게 전한다. 10만원짜리 칩이다.
"미친, 진짜?"
"이제 돈 없어서, 내일 죽으려고요."
칩이 하나도 남지 않은 도아연이 판에서 가장 먼저 빠진다. 그는 방금으로 3000을 잃고 4억 3334만 원으로 빚을 갱신한다. 죽으려는 사람의 돈은 받을 생각 없는지 칩을 받은 구경꾼이 그 뒤를 쫓아간다. 착하기도 해라. 도아연은 저렇게 말해놓고 죽은 적이 없다. 오늘 처음 온 사람이었나보다. 어깨를 잡아세운다.
"당신 왜 그렇게 살아요?"
멈춰선 도아연이 뒤돌아본다.
"빚 4억 3334만원은 사람이 아니죠. 쓰레기죠. 패륜에 인생 종쳐서 더는 살 가치가 없지. 그런 사람이죠 사람은 보통 그럴 수 없지..."
"소문 들어보면 당신은 금방 회생할 수 있어 보이는데."
"입 닥쳐요. 난 쓰레기야. 난 쓰레기일 운명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난 쓰레기였어요. 다른 가능성 따윈 없어요. 내가 성공한 세계가 있을 순 없다고요. 빚 4억에 사업 망치고 일도 망치고 인생도 망치고 친구가족인 맥 없는 참을성 없는 유치한 사회 부적응자. 이딴 사람이 성공할 수 있 을 리가 없잖아요? 한 짓을 보니까 천성이 글렀는데? 당신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상대가 미친 사람 보듯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그런데 도아연은 제정신이었다. 한숨을 내리쉬었다.
"멍청하긴. 요약해 드릴게요. 출근하기 싫어서요. 상사 믹스커피 타주려고 지하철 타는 거 존나 짜증나서요."
이게 그의 민간인으로서의 마지막 발언이었다. 도아연은 다음날 로또 1등 당첨 후 특이점을 발현한다.
*
도르륵. 도르륵. 주사위가 계속해서 굴러간다. 키? 185cm가 좋겠어. 왜냐면 그게 내 키거든. 77kg정도가 적당하지… 딱 평균의 묵직한 몸이야. 19880519. 나이랑 생일은 바뀌지 않는 편이 적응 쉽지 않겠어? 도르륵. 도르륵. 도르륵… -2147483648과 10의 42승 사이의 값을 내놓는 주사위에 기꺼이 몇 만 년 바쳐 185, 77, 19880519를 뽑는다. 자신과 같도록 만든다. 익숙한 게 좋다면서. 높을 수록 좋은 것과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의 능력치를 높게 뽑는다. 머리는 똑똑할 수록 좋아. 경제를 보는 눈이 부족했어. 경영… 실패 했으니 이게 젤 부족하겠지. 도르륵. 도르륵……
그렇게 영겁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몸을 채택한다. 빠져나와 제 손을 내려다보면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기분 탓이라고 넘긴다. 거울을 본다. 겉보기가 바뀌지 않았다. 어라, 조금 더 잘생기게 설정했는데… (후후.) 잘생겨졌나? 아니, 원래도 잘생겼었잖아.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이게 완벽한 몸인가 보다. 이게 완벽한 몸이다. 이게 완벽한 몸이다 이게 완벽한 몸이다.
하하! 세상 살기 쉽네.
*
도아연은 피와 살 도박장을 걷는다. 가늘어진 눈으로 수많은 주사위가 판 위에 깔린 것을 본다. 장난삼아 주사위 하나를 굴린다. 16498431가 나온다. 키로 설정한다. 와. 이러면 16498431cm겠네. 안색이 파리해진다.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다. 조심스레 제 이마를 닦아내린다. 키만 정해진 몸을 채택한다. 도박장의 출구가 나타난다. 그곳의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 나간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이 도아연을 반긴다. 키가 16498431cm가 되는 일은 없다. 기억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 선명하게 기억난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머리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다. 쿵. 쿵. 쿵. 속이 뜨거워진다. 불타는 것 같다. 터질 것 같다. 이대로 폭발해서 죽어버릴 것 같다. 터진다고 생각한 순간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버리고 싶어서 만들어낸 것이 나다. 내가 정의한 완벽함이 나다. 전생의 나. 과거의 나. 지금의 나. 실패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면 그건 나니까. 왜냐면 그건 운명이니까. 그런데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내 운명은 완벽하지 않다. 꿈을 이룰 수 없다. 그런 운명이다. 맞는 그릇은 없다. 나는 뭐지?
뜨거운 물이 흐른다. 흐른다… 계속해서 흐른다, 흐느낀다. 양 뺨을 적시고, 제 옷 소매를 젖히고…. 살고 싶지 않아.
5차미션-신앙-도아연
운명, 주사위, 도아연.
운명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행운이라 믿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가 정신에 정신이라 이름 붙였듯 행운에도 행운이란 이름이 붙었으니 있는 걸까?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물리법칙으로 환원해 낼 수 없으니 보다 추상적인 행운은 꼭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믿는 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계 장치의 신과 같이, 전부 이 탓이라고 여긴다면 거스르고 거슬러 무엇도 반박할 수 없다. 원한다면 진리라고 믿고 숭배할 수도 있다.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은 우연이라고 취급할 수밖에 없으니까. 우주가 ‘왜’ 생겨난 것인지 모르듯…. 이 강력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믿음은 신앙과 맞닿아있다. 그러니 모르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때론 아무런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 될 뿐이고.
인간은 스스로를 정의하고 정립하길 즐긴다. 스스로의 성격에 단어를 붙이고 스스로 성별을 정한다. 이름 없이 살지 않으며 자신이 겪고 깨달은 것들을 설명하고 내리 적는 걸 좋아한다. 경험과 생각은 사람을 이루기 때문에 그 경험과 생각을 정의하려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되었다고. 그런데 그걸 알아낼 수도 설명할 수도 없게 된다면. 그 일들이 우연, 운명, 행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면 그건 자아를 잃는 일인가.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는 건 자아를 잃는 일인가. 내 모든 경험과 생각이, 꿈을 이루겠다는 노력이 확률에 의해 '실패자'또는 '승리자'로 천차만별 갈려서 수없이 많은 평행우주로 존재할 때.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이 되는가.
그래. 그랬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변칙적인 존재라는 걸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성공한 내가 있단걸 알고싶지 않아서. 믿었던 노력이 배신해서. 운명이 실존해야만 했다. 세상만사 전부 정해진 일이어야 했다. 달의 뒷면은 존재하고 고양이는 상자 안에 죽었으며 양자역학은 틀려야 했다. 완벽한 나를 완벽히 죽여야 했다. 나는 ‘파산한 사업가’에 걸맞게 어느 우주에서나 실패자여야 했다. 나는 ‘모든 걸 잃고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 살아야 했다. 마치 주어진 자리를 연기하는 것처럼. 정해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처럼.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공한 나'라는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고. 새로 태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
우연, 운명, 행운, 신과 나란히 앉았다.
“음… 왜 제게 이런 운명을 줬나요?”
신이 주사위를 굴렸다.
“그래요. 왜 그러냐고요.”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테이블에 엎드리기도 했다. 손끝으로 주사위를 만지작거렸다. 이 강력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것들이 눈앞에 존재한다. 어라, 실존하네… 진짜 당신들 탓이잖아.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그러나 운명을 믿는 것 또한 나의 선택이었음을 떠올린다.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을 뿐이다. 모르고 살면 됐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였는데. ‘내가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입을 열 때, 많은 각오와 다짐이 있었다. 시사한다.
“나는 처음 로또에 당첨됐을 때, 이딴 거 필요 없으니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죽지 못했어요….”
“내가 성공하는 상상을 몇 번이고 했어요. 내가 성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당신들을 믿었어요. 내가 나로인해 죽기 싫어서. 차라리 죽임당하는 게 좋아서.”
“난 더이상 실패자 하고 싶지 않아요. 로또에 당첨되기 위한 인생을 사는 것도 싫어요. 그러지 않아도 살 수 있어요.”
“나 이젠 당신들을 믿지 않아도 날 지킬 수 있어요. 내겐 손을 잡아줄 사람도. 나의 일부가 되어주는 사람도. 내 단점을 장점으로 봐주는 사람도. 내가 당신들에게 대항하길 원하는 사람도. 내 심장이 뛴단 걸 알려주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살았다고 해주는 사람도 있어요. 내 가능성을 긍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나 이제는 당신들을 믿지 않아도 날 지킬 수 있어요. 믿음은 용기를 주지만 당신들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여야 해요. 믿음은 영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대로만. 안식처로만 남아있어요. 나처럼 필요한 사람이 믿을 수 있게. 너무 간섭하지도 말아요. 지금처럼 멋대로 죽이지 마세요. 그들은 사실 자립 가능한 사람들이니까.”
테이블 위의 주사위를 훔친다. 일어나서 뒤로 달린다. 난 파산한 사업가이긴 하지만 실패자는 아니고, 로또에 당첨됐지만 모든 걸 잃기 위해 살려고 한 건 아니야. 다시 사업 차리기도 꿈 이루기도 뭐한 이 세계에서 살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언젠가 슬프지 않게 될 때까지 사는 거다. 언젠가 행복하려고. 그래서 '살고 싶다'면 될 것 같다. 누구들처럼. 죽고 싶은 이유 많지만 살고 싶다는 단 한 문장으로 족해. 내 태생은 문제없어. 내 운명도 문제없어. 그저 손에 쥔 주사위를 간직한다. 나같은 신자도 사는데 당신들이 죽진 말아요.
운명은 당신들, 주사위는 가능성, 도아연은 도아연이에요.